PGR21.com
- 경험기, 프리뷰, 리뷰, 기록 분석, 패치 노트 등을 올리실 수 있습니다.
Date 2006/03/06 00:47:35
Name Bar Sur
Subject [잡담] 그렇게 그 해 여름은 끝이 났다.
어느 여름에 나는 학교를 휴학을 하고 집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데에만 골몰해 있었다. 그건 정말이지 소모적인 시간들이었고 나는 처음 내 목표가 무엇이었는가를 잊어버린채 점점 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자기자신에 대해서 우울해했다. 내 안에서 그간 어중간하게 출렁거리고 있던 것들이 스믈스믈 발밑의 그림자가 사라지듯 죄다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난 그걸 막을 수도 없었고 어떻게 되돌려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매미만이 시끄럽게 울어대는 무더위의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 여름의 한 가운데에서 내 자신이 텅 비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 안에는 그저 無만이 온 몸에 꽉 차서 나는 웃지도, 울지도, 소리지르지도 못하고 그저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매미 소리가 유난히 소란스러웠던 오후의 한 때, 결코 무엇에도 그럴 듯한 반응을 보일 수 없었던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소리를 찾아 바깥으로 걸어나갔고 집 밖의 나무의 그늘에 떨어져 있는 매미 유충의 허물을 발견했다. '아, 텅 비었다.' 그 내용물은 어디로 가버렸나? 하지만 그건 내용물이 사라져버린 껍데기 같은 게 아니었다. 그건 그저 하나의 가능태의 형상이었다.

그 길고 무더웠던 여름이 끝나갈 무렵에 나는 내가 그 무엇하나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그건 단지 내가 스스로를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 뿐이었다. 나는 아무 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아니, 잃어버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나는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것을 볼 수 없었다. 그 텅 빈 자기자신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 뿐이다.

대개 학창 시절을 지나면서 우리는 여러모로 그 시간을 통해 자기자신에 대한 시각들을 조율해나간다. 친구들, 선생님, 부모님, 그리고 여러가지 형태로 제시된 시험지 속에서 여러모로 자기자신의 '그릇'을 재어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정말이지 외재적인, 사실 어떤 의미로도 개별자인 나의 사실성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그릇일 뿐이다. 우리의 가변성이란 그런 그릇의 형태만으로는 잴수도 채울 수도 없다.

누구나가 언젠가는 그런 시기를 겪게 된다. 다만 우리는 좀처럼 그것을 보지 못한다.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거기가 시작점이라는 걸 불현듯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작 텅 빈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면, 나 자신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시작하지 않는다.

지금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동시에 내가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인식과 함께 하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그 가능태가 모든 현실태를 내포하고 있다. 텅 빈 것은 동시에 모든 가능한 형상들로 꽉 차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걸 알았을 때, 그 해 어느 때보다도 무더웠던 나의 여름이 끝이 났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물빛은어
06/03/06 01:15
수정 아이콘
님~좋은글 읽었습니다^^
글 잘 쓰시네요. 서점에서 우연히 짧은 에세이를 읽은 느낌이랄까요..
세이시로
06/03/06 01:23
수정 아이콘
Bar Sur님의 글도 꽤 오랜만에 읽은 거 같네요.
갑자기 여름이 된 거 같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마술사
06/03/06 01:51
수정 아이콘
하루키 단편을 읽은 느낌이예요~_~
Nada-inPQ
06/03/06 07:58
수정 아이콘
역시 좋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Juliett November
06/03/25 21:22
수정 아이콘
왠지 지금의 저랑 매우 비슷한 느낌이에요.. 보고 또 봐도...
다만 아직 전 껍질을 벗어났다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죠.. 후...

Bar Sur님 글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23578 맵을 수정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6] Yang4194 06/06/02 4194 0
23576 왜 강민 여자팬들에게만 '샤우팅'이란 말을 자주 쓰죠? [124] 김호철8933 06/06/02 8933 0
23575 악마여! 황제의 타이밍을 끊어라! [23] 완전소중류크5075 06/06/01 5075 0
23574 다음주 8강도 오늘못지 않게 처절할듯....... [24] SKY924911 06/06/01 4911 0
23573 프링글스 8강이 서서히 진행되고 있네요,, [124] yellinoe6091 06/06/01 6091 0
23571 스무살이 다 되도록 이해가 안가는 것들.. [28] 볼텍스4002 06/06/01 4002 0
23569 6월달 랭킹이 나왔습니다. [29] SKY925457 06/06/01 5457 0
23568 스타리그 24강에 대한 생각 [31] 가승희4434 06/06/01 4434 0
23566 [영화]짝패 _리얼 난투(스포일러 약간 주의) [20] [NC]...TesTER4065 06/06/01 4065 0
23565 신한은행 8강 1주차 간단 감상 [7] Artemis4138 06/06/01 4138 0
23564 장육, 오영종, 박지호, 강민 그리고 박명수 [20] Radixsort6339 06/06/01 6339 0
23563 '잊어먹진 않았어요....' [12] 삭제됨3829 06/06/01 3829 0
23562 (독백) 아직은 응원하고 싶습니다. [7] 아반스트랏슈4321 06/06/01 4321 0
23561 재결합..... [15] HerOMarinE[MCM]4157 06/06/01 4157 0
23559 20살의 새내기가 느낀 투표 [63] 낭만토스3869 06/06/01 3869 0
23558 " 절대로 사자는 사슴을 잡지 못한다 " [13] Andante4273 06/05/31 4273 0
23556 최가람,.변은종.. 화끈해서 좋습니다.^^ [23] 김호철3889 06/05/31 3889 0
23555 'e스포츠 스폰서십 효과'에 대한 설문조사입니다^^ [40] 이효례5088 06/05/30 5088 0
23554 내일 MSL에서 4강의 윤곽이 드러나겠군요....... [56] SKY925068 06/05/31 5068 0
23553 온게임넷... 토너먼트 계속 유지할껀가요 ?(수정) [53] 황제의마린5346 06/05/31 5346 0
23552 평소 스타리그 8강이라면.. [73] 이쥴레이5834 06/05/31 5834 0
23551 어떤맵에서 할까요? [17] 64675754333 06/05/31 4333 0
23550 [잡담] 무심한 눈동자 [2] Bar Sur3887 06/05/31 3887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