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
알프스 산맥을 건너 내려온 모든 초창기 외국 출신의 용병들은 살인에 숙달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계속된 고급인력의 소모와 규모 확대로 인해, 용병단은 이제 그저 기회를 찾아 고향을 떠난 어중이 떠중이들을 받아들여 자체적으로 훈련시키고, 제대로 된 군인으로 거듭날 수 있게끔 자신들만의 체계적인 훈련 커리큘럼을 마련해야만 했습니다.
처음 용병단의 일원이 된 십대 초반의 소년들은 나이 많고 숙달된 용병의 하인이나 시종 노릇을 하며 훈련을 시작했는데, 그들은 아마 대부분 해당 용병단에 아버지나 삼촌, 또는 아는 형들 등 인맥을 따라 흘러들어왔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질구레한 일부터 시작했는데, 갑주나 무기를 항상 최선의 상태로 유지하는 법, 선배들을 위해 물을 나르고 부상병을 처리하는 법, 그리고 기타 잡무나 운반 같은 것들을 하다가 점차 운명에 따라 훗날 자신이 맡게 될 역할에서 필수적인 전문지식을 교육받게 됐습니다.
기병이 될 소년들은 기마술과 말 관리법을 배웠을 것이고, 궁수나 석궁병이 될 소년들은 활과 쇠뇌를 다루는 법을 배웠을 것입니다. 높은 신분의 귀족들, 이를테면 고용주의 자식들이나 지휘관들도 용병대장들과 함께 전략을 논하며 영향을 주고 받았습니다. 특히 어린 귀족 소년들은 용병대장들에게 무술이나 계약 협상, 그리고 군을 지휘하고 운영하는 일들 전반에 대한 가르침을 받기도 했습니다.
빽빽한 대열을 유지하며 전투에 임하는 것은 한 두번의 훈련으로 될 일이 아니었기에, 개인적인 본능을 거스를 수 있도록 오랜 시간 엄격한 훈련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오합지졸과 정예병은 훌륭한 무기나 보급만큼이나 해당 부대가 얼마나 훈련에 많은 시간을 쏟았느냐에 따라 갈렸습니다.
거주지
용병단장은 부하들이 묵을 장소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간혹 용병들이 도시에 주둔할 수 있도록 허락된 운좋은 경우에는 폭행사건과 절도사건이 빈발했습니다. 고용주가 다스리는 수도 근처의 작은 촌락에 신세를 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당연히 폐해가 엄청났기에 뒤로 갈수록 들판에 거대한 천막 야영지를 형성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습니다. 이 움직이는 도시는 형형색색의 화려한 천막들로 되어있었기에, 당대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고용주 도시의 상인들은 위수지역 내의 이 용병들에게 각종 생필품 등에 바가지를 씌웠습니다.
이 움직이는 야영지에는 갖가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외과의 겸 이발사들, 탁발수도사나 점쟁이, 잡상인이나 약팔이, 낭인용병이나 방랑기사, 그리고 군대가 가는 곳에는 늘 따라다니는 여자들이나 도둑들, 구걸하는 자들이 이 주위를 맴돌았습니다. 온갖 사람들이 몰려드는 야영지는 당연히 범죄와 질병의 온상이 되었고, 콜레라나 티푸스와 같은 각종 수인성 질병이 유행했습니다. 그러나 고용주가 임금을 체불할 경우, 용병들은 이 곳을 떠나려 하지 않음으로써 일종의 시위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의료
외과의가 이발사 역할을 겸했다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 이 당시의 의학수준은 상당히 열악했고, "건강회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의사를 보지 않는 것"이라는 페트라르카의 말이 딱히 과장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골절상에 부목을 대거나, 상처를 봉합하는 것 정도는 이루어졌지만, 적절한 소독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가벼운 상처는 인두로 지졌고, 역방향으로 수염난 화살에 맞은 병사들은 화살을 빼내면서 2차적인 손상을 입어야만 했으며, 그런 상처에는 끓는 기름이 부어졌습니다. 복부 관통상을 입은 용병은 복막염에 시달리다가 죽었고, 폐가 뚫리거나 두개골이 함몰된 사람도 마찬가지로 앓다가 죽는 수밖에 답이 없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숨을 불어넣었는데, 공기가 두개골이나 목, 그리고 가슴팍의 어떤 부분에서 새어나온다면, 남은 일은 명복을 빌며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