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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10/07 01:34:24
Name 마스터충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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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스포)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정치적인가? (수정됨)


결론: 정치적이지만, 정치적이지 않다. 왜냐면 관객에게 메시지를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번 글은 일단 결론부터 박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한번 찬찬히 쌓아가 보려 합니다. 본론에 앞서 이 영화에 대한 평가부터 말씀드리자면, 폴 토마스 앤더슨(이하 'PTA')의 작품 중 가장 유쾌했고, 그런 만큼 가벼웠다고 생각합니다. PTA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묵직한 울림에 반했던 사람이다 보니, 저에게는 이번 작품이 그의 필모 중에서 중간보다 아래에 위치한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화가 재미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에게 별 5개짜리 작품이 많은 감독인지라 상대 평가가 아쉽다고나 할까요? 별점으로 보자면 5점 만점에 4점을 줄 것 같습니다.


완성도 높은 스토리란 무엇인가?

마케팅 관련 업무를 하다 보면 이런 얘기를 흔히 듣습니다. "이번 제품 소개는 스토리텔링으로 접근해 봤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반문한 적이 정말 많습니다. "여기 무슨 스토리가 있어요?" 스토리라고 말하려면 2가지 필수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그게 없으면 스토리라고 불러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인물'과 '사건'입니다. (스토리 작법에 관한 이론은 많이 있지만, 워낙 다양한 작품이 쏟아지고 있고, 클리셰를 비트는 스토리도 넘쳐나는 상황에서, 절대 빠져선 안 될 것만 추리자면 결국 인물과 사건만 남지 않나 싶습니다. 갈등? 요즘은 갈등 없는 이야기도 많은 것 같아요)

그럼 완성도 높은 스토리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인물에 걸맞게 사건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영화를 보다가 "쟤 갑자기 왜 저래?"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개연성이 없네."라는 소리가 이어지고 산통 다 깨지는 법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황당한 전개가 나와도 '쟤라면 저러고도 남지.'라는 생각이 들면 개연성이 확보되고 관객이 몰입하게 됩니다.

문제는 많은 영화의 스토리가 인물에 따른 사건의 전개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반대로 사건에 인물을 끼워맞추려고 하죠. 액션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데, 스릴 넘치는 카 체이싱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쩌는 격투씬도 넣었으면 합니다. 그런 장면이 나와야 영화가 흥행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런데 주인공이 은퇴한 특수부대 요원이라 나이가 70이 다 됐네요? 아 됐고, 격투씬에서 주인공이 이기긴 해야 해. 그래서 20대 팔팔한 빌런을 맨손 격투로 파바박 물리칩니다. 흘러가는 상황이 전혀 그럴듯해 보이질 않죠. 그러면 "핍진성이 없네." 소리가 나오게 됩니다.

따라서 완성도 높은 스토리는 인물에 맞춰 사건이 전개되어야 합니다. 인물에 따라 작은 플롯의 결말이 정해지고, 그 결말이 다음 플롯으로 이어지며, 그게 전체 서사를 완성하게 되죠. 그러면 개연성이나 핍진성 부족을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인물에 맞는 가장 자연스러운 스토리가 이어질 뿐이니, 개연성과 핍진성이 알아서 맞아들어갈 수 밖에요. 반대로 사건에 인물을 끼워맞추다 보면? 그지 같은 스토리가 나올 가능성이 생깁니다. (물론 안 그런 경우도 있죠)

더불어 인물에 맞춘 전개는 디테일을 완성하기도 합니다. 밥 퍼거슨이 옥상을 뛰어 넘다 추락하거나, 달리는 차에서 쉽게 뛰어 내리지 못하는 장면은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나이의 아재라면 당연히 저럴 거라는 개연성과 핍진성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코믹한 장면들이 그저 인물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완성되는 걸 보게 되거든요.


흥미로운 스토리란 무엇인가?

완성도가 높다고 재밌으리란 법은 없죠. 재밌으려면 인물이 반짝이거나, 사건이 반짝이거나, 둘 중 하나가 매력적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여기서 PTA는 인물에 초점을 두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주어진 사건 속에서 인물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그 반응을 제대로 포착하기 위해 얼굴 클로즈업도 많이 사용하는 편이고요.

여기에 또 다른 요소를 더하는데, 인물들이 하나같이 나사가 빠져 있다는 점입니다. 그의 주요 작품들을 보면 주인공이라 부를 만한 인물 중에 멀쩡한 사람이 없습니다. 전부 다 어딘가 고장 나 보이죠. <데어 윌 비 블러드>의 주인공은 욕망에 눈이 먼 사람이었고, <마스터>의 주인공은 PTSD로 인해 심신이 무너진 사람이었습니다. <팬텀 스레드>의 주인공은 병적인 집착을 가진 사람이었고요. 그리고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진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스티븐 J. 록조도 욕망에 눈이 먼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나사가 빠진 인물들이 등장하다보니, 종종 "쟤 갑자기 왜 저래?"하는 순간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면, 당혹스러운 게 아니라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현실 속의 사람도 그렇잖아요?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는 것 같지만, '그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지.' 하게 되는 것 처럼요.

이 나사 빠진 인물들은 PTA 영화가 뻔한 전개가 아니라 예상하지 못한 흥미로움으로 나아가도록 만듭니다. 그러면서도 "그럴 만해."라며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죠. 그래서 PTA의 영화는 "인물을 따라가라."라는 스토리 작법의 정석을 따르면서도 흥미로움을 잃지 않습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나사 빠진 인물들

처음 등장한 나사 빠진 인물은 퍼피디아 베벌리힐스입니다. 정말 위험해 보이고, 그래서 매력적으로 다가오죠. 이 인물이 어떤 나사가 빠졌는지 잘 보여 주는 장면이 폭탄을 설치하고 밥 퍼거슨에게 한 판 뜨자고(?) 조르는 장면입니다. "완전 또라이네." 소리가 나오죠. 그 또라이 기질(인물) 때문에 예상치 못한 전개(사건)가 벌어지고, 이 결과는 영화의 핵심 플롯을 이끄는 원인이 됩니다.

퍼피디아의 캐릭터는 그녀가 밀고를 하게 된 이유도 납득하게 해 줍니다. 자기 욕망이 가족보다 소중한 사람이니, 밀고자가 되는 게 당연해 보인다고나 할까요? 그런 후에도 또 다시 자기만을 위해 종적까지 감추는 걸 보면, "퍼피디아라면 저럴 거 같아."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 다음으로 등장한 또라이는 스티븐 J. 록조입니다. 흑인인 퍼피디아를 흠모해서 거사 치르겠다고 말도 안 되는 짓거리까지 벌이는 여미새에 나중에는 꽃까지 들고 찾아가는 순정남이죠. 그런데 나중에는 인종차별 비밀 조직에 가입하고 싶어서 온갖 알랑방구까지 끼는 정신 나간 놈이죠. 여기서 확실히 알 수 있는 점은 그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란 점입니다. 그보다는 욕망에 눈이 먼 사람이라 보는 게 맞을 겁니다. 반짝이는 건 전부 손에 넣고 싶은 사람인 거죠. 그래서 반짝이는 퍼피디아를 가지고 싶었고, 성공을 위해 인종차별 비밀 조직에 가입하고 싶었고요.

스티븐의 캐릭터는 결말의 비극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자기를 죽이려고 암살자까지 보낸 조직에 다시 돌아가는 게 말이 안 되죠. 아마 평생을 숨어 지낼 정도로 조심성 많았던 프렌치 75 단원들이라면 절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스티븐은 욕망에 눈이 멀었거든요. 그 결과 자기를 죽이려는 조직에 제 발로 찾아가는 멍청한 짓을 합니다. (설령 암살자가 누구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했다면 절대 그 자리에 돌아가선 안 됐죠) "아니, 어떻게 저런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할 수 있지?" 그 이유는 스티븐의 캐릭터가 그런 캐릭터이기 때문입니다. 윌라 퍼거슨을 쫓아 수녀원을 발견할 때는 천재적인 후각을 보여줬으면서, 정작 결말에서는 멍청한 행동을 하는 이유. 둘 다 그가 가진 거대한 욕망으로 설명할 수 있죠.

청부업자인 아반티의 행동도 캐릭터가 설명해 줍니다. '왜 갑자기 주인공을 도와주는 거지?' 싶은데, 왜냐하면 그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요. 어린 아이를 죽이라는 청부를 거부했던 사람이었죠. 그런데 자기가 데려다 준 어린 아이의 결말이 너무 뻔해 보입니다. 자기 신념을 위해 결국 총을 들게 되고, 그 덕분에 주인공의 운명은 크게 바뀌게 되죠. 이 급작스러운 전개가 이해되도록 만드는 건 인물이라는 확실한 개연성이 뒷받침되기 때문이겠죠.


이 영화는 정치적인가?

<데어 윌 비 블러드>와 관련해서 PTA는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로 석유 회사들이 미국의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현상에 목소리를 내고 싶으셨나요?" PTA는 이렇게 답합니다.

"아니요. 어떻게 그렇게 연결할 수 있죠? 우리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주인공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었고, 그 이야기의 핵심은 '주인공과 아들' 그리고 '주인공과 마을'의 관계였습니다. 이렇게 인물의 행동에 집중하다보면 큰 일은 사고처럼 알아서 발생하는 거죠."

PTA가 인물에 집중하는 스토리텔링을 보여주고, 그리고 그 매력 요소로 나사 빠진 인물을 보여 주지만, 그렇다고 사건을 대충 설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기 나이트>나 <매그놀리아>처럼 대중이 잘 모르는 세계를 그리기도 하고, <데어 윌 비 블러드>나 <마스터>처럼 정치적으로 민감한 역사적 소재를 가져 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게 PTA가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목적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치적 요소를 가져오는 이유가 그것이 매우 현실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은 정치와 뗄 수 없고, 그런 차원에서 자연스럽게 정치적 소재도 활용하게 되는 거랄까요? 그에게 정치적 소재는 완성도 높은 허구를 만들기 위한 가장 좋은 재료인 셈이죠.

제가 PTA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교조적인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려다 망하는 PC주의 작품이 많은 현실에서 PTA가 더욱 돋보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냥 삶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떤 메시지를 가져가느냐를 관객의 몫으로 남깁니다. PTA의 작품에서 어떤 메시지를 얻더라도 전부 다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똑같은 현실을 보고 다른 교훈을 얻는 것처럼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보고 누군가는 이민자와 인종차별에 대해 분개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저항이 꼭 폭력적이어야 하는지 의문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누군가는 저항에 폭력은 필연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겠죠. PTA의 작품은 이 모두를 정답으로 만듭니다. 왜냐면 메시지가 아니라 삶을 만들었으니까요. 가장 완벽한 수준의 허구를 만들어 내는 감독이 바로 PTA라고 생각합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보며 이 말이 가장 많이 떠올랐습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인물들이 처한 상황이나 결말을 생각하면 대부분이 비극적입니다. 참 기구하기도 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그 비극이 사필귀정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그런 모습이 유쾌하게 다가올 수 있는 건, 우리가 스크린이라는 창문을 통해 멀리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겠죠. 그런 인생의 진리가 느껴지는 작품이 바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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